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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조선을 지리학자로 바라보았던 솔뫼성지 김대건신부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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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성지에 생가가 남아 있는 김대건신부는 이땅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김대건은 조선을 위한 조선의 목자였으며 신부들이 교우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조선의 산천을 보듬어 그려냈다고 합니다. 지금 솔뫼성지에서는 그의 발걸음을 쫒아가는 전시전이 열리고 있어서 가보았습니다. 

마치 서독과 동독이 있었던 시기에 국가를 분단시켰던 통독의 벽과 같은 느낌을 받는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색속에 다양한 이야기와 김대건 신부의 생각을 그려놓았습니다.  

제가 솔뫼성지를 찾았던 때는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이곳은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성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다양한 볼거리와 로컬푸드 장터를 비롯하여 카페도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솔뫼성지의  김대건 신부는 26세가 되던 1846년 9월 국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솔뫼성지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조선의 정치와 사상이 변화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몇년이 지났지만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당진을 비롯한 충남의 성지들은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종교와 상관없이 여행지로 다시 한번 알려졌습니다.  

안쪽에 들어오면 김대건신부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며 조선지리학자로서의 모습을 전시해두었습니다. 스승 리브롸 신부에게 청한 물품들은 지도 제작을 위해 필요한 도구였다고 합니다. 그의 활동과 증언들 속에서 조선의 지리학자 김대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김대건 신부가 그냥 신부로서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조선의 지리학자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는 관점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16세에 유학을 떠났으며 사제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중국과 동남아시아 곳곳을 여행하며, 당시로서는 첨단의 신문물인 서양 과학기술을 직접 체험했다고 합니다.  

김대건은 조선인 최초로 서양 학문을 공부한 유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프랑스러로 소통이 가능했으며 중국인 행세를 할 정도로 한문과 중국어에도 능통했고, 감옥에서는 영어로 된 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김대건은 서울에서 작은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신자를 모아 중국으로 함께 더났는데요. 1845년 같은 해에 폭풍우와 역풍을 겪으며 뜻하지 않게 제주가지 밀려갔던 라파엘호는 1845년 10월 12일 마침내 강경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렸던 지도에는 한강 하류를 포함한 서해안 일대의 해로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으며 서울과 독도가 표시되어 있는데요. 모든 지명이 한글 발음에 따라 로마자로 표기된 최초의 지도였다고 합니다.  

'김대건. 조선을 그리다'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솔뫼성지 내 김대건 신부 기념관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성직자를 넘어 지리학, 조선학, 측량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신지식인 김대건 신부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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