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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무더운 여름에 찾아가본 창원의 김주열열사 인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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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도 예상보다 더 덥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데요. 요즘에는 물가도 올라가고 전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기억이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면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마산의 김주열 열사 인양지를 찾아가보았습니다. 

마산항이 자리잡고 있는곳에 김주열 열사 인양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3월 15일에 일어난 의거는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면서 사람들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진실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게 창원에는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도 만들어졌습니다. 

마산에서 일어난 3·15 의거는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민들이 일어났고, 이때 실종되었던 김주열 열사가 그해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라 '4·11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학생이었지만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1960년 부정선거의 양상은 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는데 마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가 되었습니다.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마산의 앞바다에서 시체가 떠올랐을 때 시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저 끝에는 마산에 만들어진 해양신도시도 있습니다. 해양신도시의 활용이 어떻게 추진될지 기대가 되네요.  

10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 이 바다에 민주의 횃불로 떠 오르다라는 문구가 뒤에 새겨져 있네요.  

그날의 기억과 민주항쟁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 이곳에는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것은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 쓰여야 합니다.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서 사용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공권력입니다.  안타깝게도 김주열 열사 시신을 직접 인양한 김경영 씨도 당시 충격으로 사건 1년 후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더운 여름날에 추모의 벽에는 그날의 기억을 시나 글로 적어두었습니다. 

탁트인 공간의 마산앞바다는 항상 여유를 느끼게 해서 저는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옳은 길을 위해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지만 그런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시체를 검시할 때 참가한 한 외과의사는,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그의 시신은 1960년 4월 13일 밤 마산을 출발하여 이튿날 아침 고향인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의 마을 선산에 묻혔으며 그의 죽음은 제2차 마산시위와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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