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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자연속에서 도를 찾고 사람의 길을 찾았던 고불맹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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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맹사성은 어떤 역사적인 기록을 보아도 흠이 별로 없는 사람중에 한 명입니다. 행동에 처신을 잘 했으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도를 걸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불이라는 호도 맹사성에게 잘 어울립니다. 

충남에 많지 않은 집성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아산의 맹씨행단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기념관이 준비중이었는데요. 지금은 완성이 되어 있네요. 


맹사성은 학문에도 소질이 있었지만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악기를 제작하던가 새로운 악보 체계를 만들었는데 아악과 향악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리를 부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인가요. 



고불 맹사성 기념관에는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이야기가 남겨져 있습니다. 맹 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 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 씨 행단"이라 부르게 된 것은 왜일까요.

 

 

맹사성의 집의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중앙에 용마루를 가로지르고, 이를 다시 양쪽 방 위의 지붕 용마루가 받아 전후면에 박공을 낸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는 맹사성의 고택은 격식이 있는 고택의 모습입니다. 

 

맹사성의 삶을 보면 자연이라는 도를 따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빈부라던가 형식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구분하지 않았던 맹사성은 세종대왕에게 장영실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에도 찬성을 했다고 합니다. 

 


피리를 불면서 소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상징되는 맹사성의 모습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악에 남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정의 의례에서도 음악에서 남다른 역량을 발휘하여 주연을 베풀 때 음악 연주를 지도하였다고 합니다. 

청백리(淸白吏)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 집안의 고택(故宅)을 보기 위해서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봅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 집의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으로 네모뿔대의 초석(礎石)을 놓아 네모기둥[方柱]을 세웠는데 살미[山彌]는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이들의 모양은 조선시대 초기의 공포를 닮았다고 합니다. 

 

고택의 앞에 심어져 있는 오래된 거목인 은행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물의 철학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약한 것을 돌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듯이 맹사성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맹(孟)씨는 중국 노나라로부터 계출된 성씨인데  고려 충렬왕 때 예부전서(禮部典書)을 지낸 맹가의 51세손인 맹의(孟儀)를 1 세조로 하여 맹의의 손자 맹희도(孟希道)가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냈고, 맹희도의 아들 맹사성(孟思誠)이 조선 세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여 맹씨의 핏줄이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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