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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가야곡면의 육곡리와 정겨운 풍경속에 자리한 행림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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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곡리를 품는 가야곡면은 백제시대에 덕근군의 행정치소가 있던 곳이며 고려시대 덕은 조선시대 가야실의 이름을 따서 가야곡면이라 부르고 은진군에 속해 있었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옛날의 지명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로 만들었을지에 대해 궁금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논산의 가야곡면 역시 논산시가 지향하는 행복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나눔, 모두를 위한 사회백신이라는 문구가 좋네요. 지금은 한참 2022 논산 딸기축제가 진행중에 있는데요. 이곳에서도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바위에 육곡리라는 지명과 그 유래를 알 수 있도록 자세히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육곡리라는 지명은 매봉 태봉 증토산에서 발기된 구릉에 의해 형성된 계곡이 6개로 큰골, 작은골, 서풍골, 요골, 지청골, 가마골이라고 하여 육곡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풍수지리설이 있다고 합니다.  

날이 풀리면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커피 한잔을 마셔도 좋겠네요. 아직은 날이 추운편입니다.  

가야곡이라는 지명이 더 익숙한 이곳에는 행림서원이라는 오래된 서원이 남아 있는데요. 양쪽으로 옛날 농촌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거리가 있습니다. 


전국에 있는 서원은 누군가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는데요.

 

 

육곡리에 자리한 행림서원은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이었던 서익을 모신 곳이라고 합니다.



서익은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했지만 이후에 많은 행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안쪽에는 민가가 있고 행림서원 옆으로는 행림서원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집이 있습니다.  

역시 서원답게 앞에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네요. 대다수의 향교나 서원에 가장 많은 나무는 바로 은행나무입니다.  

서원 앞에는 서원과 역사를 같이 한 압각수(鴨脚樹 :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서원 이름 ‘행림’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요. 서익이라는 분은 부여서씨인데 그래서 옆에는 종중 건물이 있네요. 

행림서원의 안쪽을 보니 자전거라던가 일상생활에 사용했을 생활용품들이 보이네요. 

서익은 만년에 은진현에서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고산(高山)에 대나무 만그루를 심고 만죽정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서익은 부여서씨로 망국의 설움을 안고 내려온 핏줄이라고 합니다.  부여서씨는 의자왕의 아들 서융(徐隆, 부여융이라고도 함)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서융은 660년(의자왕 22)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한 뒤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가게 되는데요. 당나라 고종은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을을 돌아보니 어르신들이 모이는 곳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비닐로 감싸두었습니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어르신들의 공간의 운영이 중단되고 있는데요. 빨리 이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서익이 터를 잡은 은진현의 부근에는 금강 하류에 위치한 강경포(江景浦)는 내륙 수상 교통과 바다의 해상 교통을 연결하는 포구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물길이지만 옛날에는 이보다도 큰 물길이 안쪽으로 들어왔다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마을을 돌아보고 행림서원과 작지만 마을 탐방을 해보았습니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아와보니 육곡리를 알리는 비가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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