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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김수남·성삼문·조계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연산의 금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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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기에 병조호란이 있었을 때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의 인물이 모셔진 서원이 논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길을 했습니다. 

강경에서 금곡서원이 있다는 금곡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황금빛 마을이라는 벌뫼길관산이라고 보입니다. 

 

채운2리 벌뫼마을은 어떤 마을일지 다음에는 찾아가보고 싶네요. 아주 인자해보이는 모습의 아저씨가 캐릭터로 만들어져 있네요. 

 

금곡서원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불망이라는 것은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금곡서원에는 불망비가 있습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날 선 논쟁의 대사들을 고스란히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로 투영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홀로 순절한 것으로 나왔으나 이때 같이 순절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1630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다가 병자호란 때 김상용과 같이 순절한 김수남을 모신 곳이 이곳 연산의 금곡서원입니다.  

 


금곡서원은 초기에는 금곡사로 불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김수남을 기리며 세워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사국(死國)의 두 글자는 남아로서 정해진 바이니, 나라의 일이 이에 이르렀는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후일에 바라는 바는 오직 내 두 아들이 어머니를 위로하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는 유서를 썼다고 합니다. 

 


금곡서원은 골목길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된다. 양쪽에는 일반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보니 외삼문의 안쪽으로 백일홍이 보인다. 

 


이곳에 모셔진 김수남, 성삼문, 조계명은 모두 지식인이었습니다. 옛날에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다고 합니다. 지식은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군자는 자기의 말이 뒤틀린 결과 행동이 허물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셔진 사람들도 일관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금곡서원은 최근에 새롭게 칠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깔끔한 모습이었습니다. 

백일홍이 뒤에 피어 있어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금곡서원입니다. 


이 전각은 충신 김수남 정려입니다. 앞서 말한 김수남은 광산 김 씨이며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다고 합니다. 충청도와 대전의 인물 중에 사계 김장생에게 안 배운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려는 정면과 측면 1칸으로, 4각 주초석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우진각 지붕을 올렸다. 4면은 홍살로 둘렀고 처마는 겹처마입니다.

 

서원의 근처에 피어 있는 꽃을 보니 마치 김수남이 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추후에는 절개를 지킨 사람으로 사육신의 한 명이며 그의 일부가 논산에 묻혀 있다는 성삼문도 같이 배향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 조계장(曺繼章)과 윤탁(尹鐸)‧박사겸(朴思謙)‧박사제(朴思齊)‧노순(盧錞) 등 함께 여러 싸움터를 누비며 전공을 세웠더 조계명도 배향하고 있는 금곡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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