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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궁지마을의 자랑이라는 문화재 백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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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서원은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던 공간이라고 합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모임 장소, 아이들의 놀이터,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였다고 합니다. 

궁지마을은 백산서원을 중심으로 바로 맞은편에 근대에서 현대로 넘나드는 삶들이 숨을 쉬고 있는 새마을구판장이 있고 지금도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오래간만에 백산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궁지 호박마을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인 듯한데 벽을 힘들게 사랑의 하트 표시를 해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데렐라가 타고 가는 호박을 상징하는 듯 보였습니다. 궁지라 함은 활을 쏘던 땅 있다는 의미였을까요. 

 

 

 

최근의 사회의 화두는 공정함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공정함이라 함은 나에게 들이대는 잣대와 타인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같아야 함에서 시작이 됩니다. 다산 정약용은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이나 집주인이 되는데 인생을 걸어야 되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말하는 것이 공정하기가 쉽지 않고, 듣는 것도 공정하기가 어렵울 때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1928년에 지어진 서원인데도 불구하고 겉에서 보면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와 함께한 것처럼 보일 정도의 건물입니다. 경내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정면 3칸의 백산사와 무인 및 무관들이 모여서 강의를 한 정면 5칸의 강당, 정면 각 3칸의 내·외삼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 서원에 쓰일 기둥으로 백두산에서 베어 서해바다를 통해 가져왔다고 합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청곡(靑谷) 윤찬을 비롯하여 구봉(九峰) 윤여임(尹汝任), 죽계(竹溪) 백선남(白善男), 죽음(竹陰) 윤자선(尹滋善), 담재(澹齋) 윤자민(尹滋民) 등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입니다. 

 

다시 백산사원의 안쪽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모셔진 인물들은 오래 전의 사람들입니다. 윤여임은 윤찬의 아들로 백선남과 함께 병자호란 때 순국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윤자선은 윤찬의 후손으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윤자민은 윤자선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현재 이곳은 문화재를 보수하는 작업 중에 있었습니다. 모셔진 인물의 면면을 보면 공정함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남한상성에서 청나라와 주화하자는 최명길과 다수의 척화파의 의견이 격화될 때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윤여임은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인 광주까지 달려갔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부근에서 전투를 하던 중에 야간을 이용한 적의 기습으로 백선남과 함께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백산서원의 중심건물은 바로 이건물로 백산사라고 현판에 적혀 있습니다. 백산 서원(白山書院)은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 있는 서원입니다. 2000년 6월 23일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5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산사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사당과 내외 삼문이 있고 강당은 무인과 무관들이 모여 강의를 하던 곳으로 5칸의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는 백산서원은 마을 사람들 생활의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사당과 내외 삼문이 있고 강당은 무인과 무관들이 모여 강의를 하던 곳으로 5칸의 건축 양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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