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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보은의 뜻으로 현 위치에 절을 지어놓은 보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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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이라는 의미는 참 좋은 의미인데요. 은혜를 갚는 것이 예전같지 않은 요즘에는 보은의 가치를 아는 사람도 많지가 않습니다. 예산에 가면 크지는 않지만 독특한 느낌의 사찰인 보덕사라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일본의 주택을 닮은 느낌의 사찰이 보덕사입니다. 이 절의 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40년(헌종 6)에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쓰면서 이곳에 사찰을 지었다고 합니다. 

보덕사는 6·25 때 소실되었으나 1951년 2월에는 비구니 수옥(守玉)이 중창하였고, 1962년에는 비구니 종현(宗顯)이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지 이 사찰을 방문했을때 비구니분들이 많이 보이더라구요. 

보덕사의 극락전 앞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3호로 지정된 석등이 있고, 절 옆 70m 지점에는 관음암(觀音庵)이 남아 있습니다. 

가야사에는 금탑(金塔)이라 불리는 지극히 빼어난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그 탑의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없고 보덕사만이 보은의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사찰은 조용하면서도 한적하고 마음에 여유를 주는 느낌입니다.  본래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있던 가야사(伽耶寺)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에 창건한 보덕사는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그 보은의 뜻으로 현 위치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 하고 벽담(碧潭)을 주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오래된 옛날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독특한 그런 느낌의 사찰입니다. 

 

향은 불에 타고 차는 끓는 물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찰과 참 잘 어울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갑자년(1864) 이후 국비를 들여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고 했다고 합니다. 토목(土木)에 금을 칠하여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엄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보덕사의 극락전 내 정면 중앙에는 아미타설법도, 그 우측에 지장시왕도, 중앙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신중도와 현왕도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많은 사찰의 중수를 지원하고 편액과 주련을 써 주기도 했으며, 불상과 불화의 시주에도 동참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흥선대원군 내외가 단독으로 발원, 시주한 경우는 보덕사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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