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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호서지방의 유력가문 광산김씨의 모선재와 김국광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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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을 대표하는 광산김씨, 파평윤씨가 가문을 이룬 호서지방은 지금의 대전과 충청남도, 충청북도를 모두 포함하는 지방을 의미하는데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의림지(義林池)의 서쪽 지방이라는 의미로 호서지방(湖西地方)이라 불렸던 곳입니다. 보통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호남과 영남을 주로 기억을 하죠.

 

인기척이 한 명도 없는 이곳에서 저만의 사색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역시 눈이 내리면 움직이기는 어렵지만 풍광은 아름답네요. 

 

이곳은 모선재라는 재실입니다. 살다보면 어떤 사람들은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요점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상황에 걸맞은 말이나 지식을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상당히 빨리 읽기도 하지만 문장의 뜻이나 맥락을 쉽게 이해하는데요. 이곳에 모셔진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그런 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문가의 재실이어서 그런지 관리가 상당히 잘되어 있는 편입니다. 능력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수많은 노력과 함께 완성되어간다고 합니다. 보통 이런 능력을 통찰력이라고 부릅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어도 통찰을 전달하기란 어려운데 상황판단능력이 상당한 장점이 있습니다.  


이 모선재라는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으로 18세기 초반에 자손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집입니다. 이 재실은 사계 김장생의 할아버지인 김호와 아버지인 김계휘를 위한 재실입니다. 팔작지붕 민도리집으로 앞면 4칸, 측면 2칸의 총 8칸 규모의 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김계휘가 명나라를 갔을 때 통주 길에서 '십구전시'를 팔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모두 600권이 되었는데 이 책을 하룻밤 사이에 다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한 권의 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이 적지 않죠. 



광산 김 씨 집안의 전통적인 문중 재실 건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황강 김계휘의 활동사항 중 독특한 것은 조선의 산천·마을·도로·성지 등의 형세와 전술적인 문제점, 농작물의 생산 현황에 관심을 가져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기록을 볼 수는 없어서 아쉽지만 남아 있다면 또 다른 보물로 기억될겁니다. 


김호와 김계휘를 모신 모선재의 뒤쪽에 오면 시대적으로 먼저 만들어진 의정공 김국광사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의정공 김국광의 불천위 사당으로 1483년에 건립되어 수차례에 걸쳐서 보수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김국광은 세조 13년(1467)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조판서로 남이장군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습니다.

 

 


제대로 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현실에서 마주치는 것은 쉽지가 않지만 역사 속에서는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논산의 한 가문을 이루면서 그 정신을 이어오는 성씨 중에 광산 김 씨가 있습니다. 보통 돈암서원을 생각하면 사계 김장생을 생각하는데 통찰력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아버지인 김계휘가 먼저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총명함이 고금에 드물었던 사람으로 기억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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