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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고려시대 국사였던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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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겨울이 오기전에 칠곡에 자리한 선봉사 대각국사비를 찾아가는 길에 단감과 관련된 문구가 보였는데요.  칠곡이 단감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나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칠곡 단감은 어떤 맛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쯤 바구니에 담아서 먹어도 좋을 듯 합니다. 

누군가를 인도하거나 가르치거나 하는 일은 스스로를 다스리고 끊임없는 수련과 오래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교적인 차원에서 누군가를 인도한다고 하지만 그 내면의 채움이나 배움이 너무나 부실한 것을 많이 볼 때도 있습니다.

 


산을 오르고 올라 가보면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대각국사는 앞서 말한  국사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라시대의 무염과 고려시대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 원증국사 보우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이곳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한 편입니다.  


임금의 스승이라고 하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을 의미했습니다. 조선시대도 그랬지만 고려와 통일신라시대에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고려와 통일신라시대에는 국사라고 하면 불교와 관련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신라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는 승관의 우두머리에게 국통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고구려 출신의 혜량(惠亮)이 그 효시라고 합니다. 

 



국사나 왕사의 선정은 초기에는 정치적·경제적 이해보다는 개인적인 신망이나 덕성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실정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현실정치와 연결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산의 중턱에서 칠곡군 문화재 분포도를 보게 될지 몰랐지만 한눈에 칠곡지역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본 곳도 있고 코로나 19로 인해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보입니다. 

 



칠곡 노석리 마애불상군이나 칠곡 묘향사 소장 신중도, 칠곡 금곡사 석조여래좌상, 위봉사 석조보살좌상,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 비등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흔적들입니다. 

 



국사는 살아 있는 사람을 책봉하는 경우와 죽은 사람을 책봉하는 2가지 경우가 있었는데, 대개 왕사가 죽을 경우 국사로 추봉 된다고 합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총명하고 슬기로워 불교의 이치에 능통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법문의 중장이라 하였으며 대장경과 아울러 불교에 관한 여러 저술들을 모아 새로이 교장을 간행하였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 세워진 비는 대각국사 의천을 기리기 위해 고려 인종 10년(1132)에 비문을 짓고 인종 15년(1137)에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의천의 생애와 송나라 유학 시기의 구법 활동, 천태교를 확립하기까지의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의 윗부분에는 덩굴 문양이 새겨진 지붕돌을 얹어두었습니다. 비문은 문장가 임존이 지었으며 덕린이 쓰고 대지와 덕천이 새겼다고 합니다. 

 

 


대각국사비는 칠곡에 있지만 그의 진영은 순천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의 발전을 도모했던 대각국사 의천은 영롱한 눈매, 듬직한 주먹코, 꽉 다문 입, 여기에 이마와 입가의 주름살을 그려, 학식과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초로의 고승의 풍모가 초상화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신라의 경우 헌안왕 이전에는 모두 교종에서 국사가 배출되었는 데 반하여 그 이후로부터 고려 광종대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선종에서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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