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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군사기술을 만나는 군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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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왕족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군사기술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지킬 수 있는 힘이 있고서야 예술과 문화를 확장시킬 수 있으며 종교와 사상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백제의 군사와 관련된 기억은 주로 황산벌전투의 계백장군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계백장군이 최후의 결전을 했던 황산벌의 논산에는 군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백년동안 국가를 유지했던 백제를 박물관 한  곳에서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100년사에서도 엄청난 정보가 쏟아지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한데 오래전에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까지 세력을 유지했던 백제를 모두 알수는 없지만 주요 사건은 배워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군사활동의 연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대별로 주요사건과 함께 당시 왕들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백제로 기억이 되기 시작한 시기는 자체 생산력의 발전과 주변지역의 통합을 통해 성장했던 경제력을 바탕으로 더욱 세력을 팽창해 3세기 후반에는 마한의 맹주노릇을 해오던 목지국까지 정복하고 한반도 중부를 석권하면서 부터입니다. 

 

한반도 중부권에서 맹주자리를 놓고 싸우던 백제가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공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부터이죠. 그리고 마지막은 부여에서 그 왕국의 마지막을 기록하게 됩니다. 

백제의 군사제도는 지방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주변 소국의 통합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정비되었습니다. 공주에서 열기 시작한 웅진시대까지는 모든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고 주로 복속된 지역의 수장층을 통해 공납을 수취하는 등의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백제의 후반부에는 수도의 행정구역도 후기에는 5부와 5항(巷)으로 이루어진 상당히 정비된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수도의 5부에는 달솔 관등을 지닌 자가 거느린 각 500명씩의 군사가 있었고, 지방의 5방에는 각각 700~1,2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다고 합니다. 5방의 장관인 방령에는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습니다. 

가야를 발전시킨 것도 철기문화였듯이 백제 역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흔히 박물관을 가보면 많이 보는 무기의 형태입니다. 

백제의 군사들이 사용하던 칼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한반도 중남부지역에는 고조선의 멸망 이후 파상적으로 남하해온 북방 이주민들이 토착주민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세력과 합쳐진 것이 바로 백제입니다. 

 

백제시대에 무기를 어떻게 만들고 각종 생필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토기들은 대부분 사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습니다. 심지어 599년에는 국왕의 명으로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이 제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듭니다. 백제사회는 왕족과 귀족을 포함하는 지배 신분층과,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일반민, 그 아래의 집단예민, 노예 등을 포함한 피지배 신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계층관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겠지만 백제 역시 한반도에 자리했던 군사강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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