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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삼도 수군통제사였던 류혁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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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면 대부분 대덕구에 자리한 동춘당 송준길이나 동구 우암 송시열을 생각하기 마련인데요. 서구에도 조선시대에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대대로 무신의 집안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평촌동에 남아 있는 류혁연의 묘를 가는 길에는 신도비도 있습니다. 류혁연의 묘(柳赫然의 墓)는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동에 있는 무덤입니다. 1991년 10월 24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류혁연이라는 사람의 신도비를 먼저 살펴봅니다. 

 

신도비에서도 보듯이 무예에도 뛰어나 무신의 시험에서 줄곧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전략과 군사행정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합니다.  1924년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가 세워졌습니다

신도비가 있는 곳에서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묘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인조 22년(1644)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삼도 수군통제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하였던 사람입니다

가는 길목에는 오래되어보이는 집도 볼 수 있는데요.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묘비의 비문은 이의국이 짓고 9대 손인 군수 유석우가 글씨를 썼다는 묘로 찾아가 봅니다.

내린 눈으로 인해 미끌거리는 곳을 지나서 묘로 다가가 봅니다. 류장군 의조부인 류형(柳珩)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명랑해전 에서 공을 세웠으며 아버지는 이괄의난을 진압한 류효걸(柳孝傑)이었습니다. 

제가 이곳을 처음 소개한 것이 벌써 4년전이네요.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갔지만 기록은 남아 있으니 시간의 흐름은 느껴볼 수 있습니다. 경신환국의 휘용돌이에 휩쓸려 사사되었던 시신을 도성 인근의 광진(廣津)나루에 가매장[藁葬]했다가 기사환국(1691)으로 신원되자 현재의 자리에 이장된 것이라고 합니다. 

최후의 순간에서도 가족들에게 원망을 버리고 자신이 못다한 충성을 다하라는 유훈을 남겼던 류혁연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근거없이 뒤집어 씌우는 죄를‘막수유죄’로 인해 희생된 사람입니다. 

눈 내린날에 오래간만에 생각나서 찾아와본 곳입니다. 류혁연 묘 밑으로는 아들 류성명(柳星明 : 1648-1723)의 묘와 그 좌측에 손자 류언장(柳彦章)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류혁연의 묘 오른편에는 증손자 류중기(柳重基)의 묘가 있습니다.  묘역 입구에는 최근에 지어진 무민사(武愍祠)란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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