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백성들이 가장 먹고살기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을까요. 조선 말기 혼란의 시기에 지주, 양반, 일제까지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힘겨루기 속에 그 힘이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구미에 가면 400년 전 고성에서 들어와 정착한 해평 최 씨(전주 최 씨 해평파)가 세거해 온 해평면 해평리 '쌍암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쌍암이라는 이름은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와 지역으로 사람은 움직이기 힘들지만 자본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이전의 경제상황으로 돌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주식 가격은 계속 올라가게 된다고 합니다. 자본이 자본을 낳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면 조용하지만 새로운 의미를 가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채 앞 굴뚝과 섬돌 사이에 1894년 인근의 '갑오동학농민군 집결지(址)'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때 농민군들은 지주와 부농으로부터 군량과 돈을 강제로 징수하였는데 이에 양반과 향리는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응하였습니다.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던 그 시기에 쌍암고택의 해평 최 씨는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농민운동으로 촉발된 국제전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이 땅에 불러들였습니다. 당시 쌍암고택은 일본군이 해평에 설치한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는데 일본군은 행군로를 만듦과 동시에 50리마다 병참부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청나라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어가던 때였습니다.
이곳의 병참기지에는 많으면 일본군이 2~3천 명, 적으면 천명이 있었는데 일본군들의 병참기지 설치를 목격한 동학농민군들은 곧 일본군과의 격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해 10월 하순에 한교리(1848~1929) 선생은 선산, 옥성, 낙동, 상주, 도개, 해평, 산동, 고야, 구미 지역의 갑오농민군을 이끌고 선산읍성을 공격해 관아를 점거하고 해평 쌍암고택에 설치된 일본군 최대 탄약 기지본부를 습격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농민군은 선산읍성에서 밀려나고 이후, 경상북도의 동학농민군은 민보군과 일본군 그리고 감영에서 파견한 진남영병에 의해 궤멸되게 됩니다. 지난 2009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결정을 거쳐 유족들은 쌍암고택 사랑채 댓돌 옆에 115년 전의 선조들의 자취를 새긴 빗돌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여인들의 공간인 안채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사랑채는 남향으로 살짝 비틀어 놓은 것이 쌍암고택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팔작집의 대청은 네 칸인데 안쪽 두 칸은 조금 높게 마루를 깔아 위계를 두었고 한쪽에는 분합문을 단 제청(祭廳)이 남아 있습니다.
구미의 선산, 해평지역은 칠곡군과 같이 군사적인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낙동강을 끼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밀리면 경남이 모두 함락된다. 일제강점기에도 고택에 머물던 일본군들이 넓은 해평들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쌀을 수탈해 인근의 낙동강 강창나루를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를 때 창고 역할을 했던 쌍암고택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인민군이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것의 가치가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이 시대에 110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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