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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회의의 파리장서에 서약했던 독립운동가 류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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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의 주역 김좌진 장군 묘역을 가는길에 보면 독립운동가 류준근 열사 묘역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는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의미가 있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1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승전국들이 회의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 해는 바로 일제강점기에 최초로 평화적으로 시작된 삼일운동이 한반도에 일어나게 됩니다.

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로 파리 평화회의, 파리 회의라고도 합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대전 중인 1918년 1월 전후에 세계 평화 수립의 원칙으로서 14개 조항을 발표한 바 있는데, 파리 강화 회의에서도 이 원칙을 표방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열강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참전하지 못해 세계열강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이라고 일본은 판단했다고합니다.

 

 

 

파리 강화회의 후에 2차 세계대전에서 무모하게 진주만을 공습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지만 심각한 불씨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패전국 독일에 대한 혹독한 배상 조치는 히틀러를 자리 잡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1905년에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나서 국권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류준근 열사는 납세를 거부하고 일본의 침략행위에 항거하여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국제적인 회의였기에 한반도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강화 회의에 대한제국에서는 137명이 파리장서에 서명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한 명이 보령에 잠들어 있는 애국열사 류준근입니다.

 

 

 

 

사실 당시 파리 강화회의에서 영국이나 프랑스는 동방의 작은 땅 한반도의 상황이 전혀 관심에 없었다고 합니다. 영국 ·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웠는데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가혹한 조약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의병활동을 했었던 류준근은 결국 일본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이 됩니다.  류준근을 비롯하여 남규진(南奎振)·이식(李 )·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 9명은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압송되어 억류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파리장서는 일제 강점 이후 유림들의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행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포악 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 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주장했지만 귀 기울 여준 열강은 없었습니다. 

 

 

 

 

류준근은 이후에 홍주의진의 활약상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 그리고 면암 최익현의 최후에 관하여 문집을 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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