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당시에 고령 지역 역시 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가 되었는데요.
경북 고령군 쌍림면 송림2길 70에 가면 그 본거지로 활용이 되었다는 죽유종택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죽유종택 앞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꽃 한송이가 마음속으로 들어 옵니다.
조형미가 대단한 꽃인데요.
죽유종택의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물건들이 주변에 많이 있네요.
죽유종택은 고창 오씨 죽유공파의 종택으로 사랑채는 1700년대 말 매촌리에 창건되었으나 1920년 대홍수로 현재의 장소로 이건 되었고 그 외의 건물들은 새로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고령에도 생각보다 인물들이 많은 편인데요.
이곳을 지은 죽유 오운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인진왜란때 의병장인 곽재우와 함께 소모관, 수병장 등으로 활약하였다고 합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은 일본의 양식이 적지 않게 배어 있습니다.
죽유 오운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광해군 때는 부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유 종택에 있는 사랑채는 한말 계몽기와 일제시기에 교육을 위한 서당으로 활용되기도 했었고 만세 운동이 있을 때 이곳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저 사당겸 유물관에는 고문서와 전적 등의 종가문서가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죽유종택은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한 곳이고, 6·25전쟁 때는 북한 인민군본부로 사용되기도 했었던 곳입니다.
옛날에 사용하던 그 굴뚝이 낮게 사랑채 뒤쪽에 있네요. 죽유는 전쟁 이후에 1600년 이후에는 영주에 머물면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문득 죽유가 동사찬요를 저술하게 된 동기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적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풍조를 바로잡고, 옛 사실을 밝혀 당시의 일을 해석하는데 거울로 삼으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구석구석에 오래된 물건들이 남아 있네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죽유 오운은 다른 선비들과 달리 당대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취하며 자신의 학문을 형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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