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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김제의 미곡지 죽산면의 하시모토사무실과 아리랑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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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온 상당수의 일본인은 일부를 제외하고 주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일본 본토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착취를 일삼으며 재산을 형성해나가게 됩니다. 하시모토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1906년입니다. 죽산으로 거주지를 이전하여 1916년 5월부터 농장을 경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산면에 그가 만들어놓은 사무실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국가나 봉건국가 시대에는 토지가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이며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모든 땅은 왕의 것이었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건 내 소유의 아파트나 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역사는 50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식주중에 먹는 것과 집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산업이 발전하고 다양한 일자리가 생겨나면서 땅에서 경작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 아닌 세상이며 이제 새로운 시기가 다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김제는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수탈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중에 땅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땅을 가졌다는 하시모토의 농장 사무실은 죽산에 남아있었습니다.

 

하시모토 (橋本)같이 일본인들의 이름은 대부분 한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이름의 뜻보다 단순합니다. 하시모토는 그냥 다릿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복이 되고 나서 그 많은 재산을 놓고 가야 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미군정은 한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있는 보따리를 제한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이곳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가옥이었을 것입니다. 1931년 김제군 죽산면 죽산리 농장을 변경하여 법인 주식회사를 세웠는데 바로 하시모토 즉 교본(橋本)의 이름을 붙여 두었습니다. 

 

지금 대기업이나 은행 등 상당수의 회사는 지주회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땅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지주'를 광복 이후에 기업을 확산해가면서 지주회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닏. 

 


하시모토농장사무실의 곳곳에는 수많은 착취의 결과물이 쌓였을 것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조선인과 일본인의 농업수입 격차가 1941년에는 96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소득의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산을 한 번 가보면 알겠지만 땅이 광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의 50% 이상을 하시모토가 소유했었다고 합니다. 오는 9월 21일부터 10월 3일까지 김제 지평선 축제가 열렸습니다. 온라인과 벽골제 및 시내권에서 만나볼 수 있는 축제였습니다. 

 

 


전에는 없었던 작은 카페가 생로 생겨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죽산 아리랑 카페입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그린 조정래 작가의 작품으로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음료를 주문하고 카페를 돌아보았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이 글감옥에 갇히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감내하면서 한계선에서 방황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리랑은 4부로 되었으며 12권의 방대한 분량에 걸쳐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을 다루면서 각 사회 계층을 대변하는 다양한 인물상을 보여주고 있던 작품입니다. 

죽산면을 시간을 가지고 돌아보니 옛날에 어떻게 살았을지에 대해 상상도 해볼 수 있고 하시모토 농장사무실과 옆으로 흘러가는 물줄기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평야에서 다른 생각과 관점,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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