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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마을 이름으로 전해지는 부여의 창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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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금강이 흘러가는 곳에 자리한 창강서원이 자리한 곳의 마을은 서원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접가보니 창강서원은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건너편에는 청양동강리오토캠핑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한적한 곳에 창강서원에 자리하고 있었네요. 부여에는 서원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잘 만들어진 서원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태극문양의 홍살문을 통해서 걸어 올라가봅니다. 창강서원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제사 지내는 사당과 배움의 공간인 강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남아 있는데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6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이전·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봅니다. 부여의 한적한 곳에 자리한 창강 서원은 조선의 조정에서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황신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서원입니다. 

황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는 정철(鄭澈)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당했다가 임란이 일어난 해에 다시 기용되어 복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인 황신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죠. 

오래된 고택처럼 보이는 창강서원의 건물이 보입니다.  1605년(선조 38)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 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모신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 되고 회원 부원군(檜原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이후 광해군과 정치적으로 대척 관계에 있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건인 계축옥사 때 유배되게 됩니다. 이곳에 모셔진 황신의 묘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창강 서원(滄江書院)의 뒤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황신은 1613년(광해군 5) 일어난 계축옥사 때 옹진에 유배되어 1617년(광해군 9)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1629년(인조 7) 문민(文敏) 시호를 받고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이곳 창강 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7두(豆)라고 합니다. 현재 사우에는 황신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은 제향 때 유림들의 숙소 및 원내의 여러 행사 때 회합장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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