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에 걸쳐 일본 전국을 누비며 흙을 찾아 헤맸는데 결국 사가현에 있는 아리타(有田)에서 흙을 발견해 계룡산 학봉리에서 만들던 분청사기를 재현하기 시작한 사람이 이삼평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1616년 고품질 일본 도자기의 역사가 조선 도공들에 의해 출발하게 됩니다.
최근에 강사가 유튜브에서 언급한 이야기로 인해 언론과 인터넷이 시끌시끌합니다. 우리 사회는 직업의 귀함과 천함을 평가하며 좋아 보이는 직업과 비교적 안 좋아 보이는 직업을 구분하는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한켠에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공원이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일본이 도자기로 유명하지만 그 시작은 1590년대 조선 침입 때 조선의 도공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일본 도예는 완전한 전환을 하게 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배움에는 때가 없고 배움에는 귀함과 천함이 없고 배움에는 정해진 곳도 없지만 한국은 배움에 때를 규정짓고 배움에 귀함과 천함을 구분하며 배움에 정해진 곳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씁쓸할때가 있습니다.
조선인 도공 이삼평(李參平)이 아리타[有田]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제작하여 보급시켰고 가라쓰[唐津] 요지도 조선인 도공들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잃기 쉽고, 쉽게 모은 것은 흩어지기 쉽고, 쉽게 뜨거워진 것은 차가워지기 쉽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도자기 하나로 일본에 꽃을 피우며 아리타만의 스에야마신사에 한글로 그 흔적을 남긴 사람 도공 이삼평은 도자문화를 꽃피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치만산이 스에야마신사로 불리게 된 것은 메이지시대 이후로 사가번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공과 도공 이삼평공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삼일운동의 의미를 담고 새로운 비도 만들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알렸으며 지금도 한국에 와서까지 그 혼을 기리는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집니다.
조선시대 기능공에 불과했으며 평민인 이삼평은 일본으로 끌려가서 일본 최초로 백색의 자기를 만들었으며 신의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도공 이삼평의 고장은 이곳 충청남도 공주라고 합니다. 공주 계룡산의 안쪽에는 그의 혼을 이어 철화분청사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며 도자기를 굽던 옛 가마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도공 이삼평을 기리는 공원과 비가 세워져 있으니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방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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