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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논산에 왕실의 핏줄이 잠들어 있는 공간의 익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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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왕실에서 26대로 이어진 임금을 기억하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이씨왕조의 흔적들은 모두 알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논산이라는 곳에도 이씨왕조의 핏줄이 잠들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익성군 신도비가 자리한 곳이죠. 

 

날이 좋은 날 여행하듯이 이곳으로 발길을 해보았는데요. 전체적으로 조용한 논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신도비가 자리한 이곳의 논산의 은진면이라는 곳에 가면 익성군 이향령묘, 익성군신도비 및 무석, 진천군 이희경묘, 진릉군 이태경묘, 진평부정이승경묘가 있으며 그 앞에는 세모재가 자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덕흥 대원군의 아들 하원군의 둘째 아들이 익성군이다. 익성군은 광해군 때 권세를 누리던 이이첨과 악연으로 엮여 있습니다.  이이첨의 무고로 익성군은 광해군 4년(1612)에 거제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신도비의 덮개돌 앞면에는 반용이 조각되어 있고 옆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의 받침은 네모진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비 몸을 거북받침 위에 세우는 보통의 신도비와 다른 형태라고 합니다.  신도비의 비의 덮개돌 앞면에는 반용이 조각되어 있고 옆과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글들이 그의 살아생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비에는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아버지 하원군과 함께 걸어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호종하였으며, 1596년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왕실의 핏줄이 잠들어 있는 묘로 올라가봅니다. 요즘에는 대부분 화장을 하기 때문에 이런 풍경도 사라지게 되겠죠. 

 익성군 묘역 우측에는 3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좌측에서 부터 진천군 묘(익성군의 둘째), 진릉군 묘(익성군의 셋째), 진평부정 묘(익성군의 넷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익성군 묘앞에는 무인석이 문인석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인석은 전체가 하나의 돌로 조각된 것으로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칼집을 쥐고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을 지키려는 것이겠죠. 

무덤에서 인생을 생각해봅니다. 모두가 태어나면 결국에는 죽게되는데요.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생각을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직재의 무옥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어 1614년(광해 6) 7월 1일 유배지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습니다. 당시 아들들 대부분이 유배 중이었기에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임시로 익산에 장사지낸 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신원이 회복 되자 1643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와서 세모재라는 공간으로 들어가봅니다.  익성군의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 93-3에 있으며, 익성군 신도비 및 무석(益城君 神道碑 및 武石)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관리가 잘되어 있는 이 건물의 규모도 작은 편이 아닙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특이하게 전체적으로 적색으로 색이 칠해져 있어서 흰색과 대비가 됩니다.  

논산하면 윤증선생도 있고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역도 있습니다. 전국의 유력 가문이었던 재실을 가보면 관리가 안되고 있는 곳이 적지 않지만 논산을 기반으로 살았던 분들의 묘역은 잘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 원래 재실은 묘지기나 산지기는 위토나 종산을 이용하여 생계를 유지하였지만 이후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천대받기를 싫어하여 나가 버려 재실의 관리가 안되었지만 이제는 지자체에서 관리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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