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떠나기

예산의 화순옹주 홍문과 백송공원

728x90
반응형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 (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와 정빈 이씨 (靖嬪 李氏, 1694~1721)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는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에는 화순옹주 홍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1732년 (영조 8)에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의 아들인 월성위 김한신과 혼례를 치르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1758년 김한이 불과 39세의 나이에 세상을 더나고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은지 14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식이야기만 두고 보면 영조도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통해 노론 일파의 당색을 조정하여 이미지 쇄신을 노렸으나 뿌리 깊게 박혀 있던 트라우마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하네요. 남편이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화순옹주가 1758년에 세상을 떠나고 불과 4년 뒤인 1762년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습니다. 



지금은 옛날의 건물은 없고 그 터만 남아서 화순옹주 홍문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묘막터는 53칸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불타 없어지고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습니다. 



화순옹주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나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들이는데요. 그 김이주의 막내아들인 김노경이 기계 유씨와 결혼해서 첫 아들을 낳는데요. 그가 바로 추사 김정희라고 합니다.



곡기를 끊고 죽을 정도면 정말 김한신을 사랑했던지 그 환경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것 같은데요. 화순옹주의 삶은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홍문 외에 화순옹주와 김한신(金漢藎)의 합장묘, 김정희묘·김정희고택이 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주변에 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딸이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정려를 내리지 않지만 정조는 정려를 내립니다. 홍문은 묘막터 정문 위에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라고 판각되어 있습니다. 



화순옹주 홍문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오면 백송공원이 있습니다. 




예산 백송공원에는 추사 김정희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도 있고 백송도 있는데요.  

가을여행에 어울리는 여행지인 백송공원에는 소나무로는 희귀한 백송도 만날 수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