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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떠나기

제89주기를 맞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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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이상재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89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독립협회 활동과 YMCA 운동, 언론활동, 신간회 활동 등을 펼쳐 민족 단일전선을 구축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라고 해서 이곳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상재 선생은 원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하는데요. 1902년 6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아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그때 성경책을 접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상재 선생이 살던 그때의 집은 아니구요. 새로 지은집이라고 합니다.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에도 소나무가 심어져 있네요. 주변에는 확 트여 있어서 보기가 좋네요. 과거시험에도 응시하지만 부패한 제도 탓에 낙방했던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입니다. 



이상재 선생은 자신의 지인인 박정양에 선물로 들어온 각종 물건을 빼버리고 책을 쌓아 놓은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천년솔 바람길의 중간에 있는 이상재 선생 생가지에서 좋은 말을 접해봅니다. 호연지기, 부동심, 무괴, 기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네모난 정자가 보기가 좋네요. 



정면으로 보이는 저 비석은 월남이상재 선생 추모비입니다. 

 



안에는 지금 공사가 마무리가 안되어 있어서 구석구석에 공사장처럼 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초가지붕처럼 만들어놓고 안에서 쉴수 있게 의자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곳은 바닥공사중입니다. 걸어다니기에는 그렇게 문제는 없습니다. 



이상재선생은 1927년에 노환으로 별세를 하는데요. 한국에서는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무려 10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말기에는 부정부패가 아주 심각했을텐데요. 그때 이상재 선생같은 행동을 하는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상재 선생 생가지에 마을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종지리 마을은 옛 한산 8경 중 건지산, 일광재, 오라릿돌 등 3경을 일목으로 조망하는 경관촌이라고 합니다. 고려 때에는 임천군의 한산현에 속하였는데요 이곳은 구한말에 한산군 북부면 지역이 되었는데 지형이 종지를 닮아서 종지를 종지등 등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월남이 태어난 이곳은 베틀의 부품인 바디의 장인들이 많이 산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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